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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3살고 있습니다./그 때 그 때 일기 2021. 10. 13. 17:28
2021.10.13
일을 하다가 이대로는 나를 갉아먹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블로그를 켜서 쓰는 일기. 지난 일기를 쓴 이후로 몇개월째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며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있다. 가끔은 주말에도 노트북을 켜서 들여다볼 정도로.
함께 회사에 다니는 친구와 그런 말을 했었다. 이 회사는 나에게 발판이지만 조금은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으면 좋겠다고. 그 말처럼 회사와 업무에 임하는 나의 자세가 그랬다. 동종 업계에서 특이하게도 야근이 많지 않은 회사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기엔 나쁘지 않은 회사이기에. 그래서 나는 소위 말하는 '꿀빨기'를 기대하고 회사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여느 회사가 그렇듯 사람은 자꾸 빠져나가고, 누군가는 업무 과중에 시달리게 된다. 하필이면 그 대상이 내가 되어 일은 넘치고 시간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심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들었던 '조금은 쉬어가는 곳'이라는 생각은 이미 접어둔지 오래고, 요즘은 '내 커리어를 위한 발판'이라는 생각도 자꾸만 저문다. 나는 뭣도 없으면서 가지고 있는 완벽주의로 인해 시간에 쫓겨 겨우 완성만 했던 결과물에 대해 만족감을 느낀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업무로 얻을 수 있는 성취감 조차 사라져 '이 일이 내 발판? 이따위로 해놓고?'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 와중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만큼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매월 꽂히는 월급은 매월 불만족스럽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워라밸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지 오래고, 내가 해내는 어느것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건들면 바로 눈물이 흘러버릴 정도로 예민해져 있고,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다른 사람의 말을 수백번씩 곱씹고 있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것들은 항상 있고, 그것들이 결국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다. 나는 일이 힘들고 지칠 때는 항상 덕질에 기대왔던 사람이다. 내가 이거라도 해서 위안을 얻어야 한다는 마음 때문인지 바쁠수록, 힘들수록 좋아하는 것에 더 집착하게 되고, 잠을 줄여가면서 덕질에 매진하게 된다. 프듀가 그랬고, 그 이후로 사랑했던 모든 덕질 대상들이 그랬다. 불안정하고 위태한 마음에 불쑥 찾아와 집착하게 만들었고, 몇개월 지속되었던 불안정한 마음이 끝나면 불타던 내 사랑도 함께 끝났다. 그게 아마 100일이었나보다.
그렇게 불태운 덕질의 끝은 항상 허무했고 굳이 좋아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좋아한 걸 후회한 놈은 한 놈 밖에 없었지만 후회와 별개로 공허함은 공허함이다. 그냥 힘든 순간을 지탱하던 힘이 사라지고, 불타는 사랑의 부산물인 카드값과 늘어난 짐에 대한 현타같은 것이었을까.
공교롭게도 이번 덕질 대상은 내가 학생일 때부터 1n년이 흐른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 플레이리스트를 떠난 적 없던 나의 가수였다.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9월 초 기적같이 앨범이 나와 나를 살렸고, 그 이후로 매주 던져지는 떡밥들이 나를 살렸다. 하물며 이번 주 조차도 그들과 관련된 전시를 보러 갈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미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팀이라, 불안정한 시기가 끝나면 함께 찾아올 공허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게 안정으로 다가왔다.
가끔 친구가 농담으로 '노부부'라고 할 정도로 미온의 관계였는데,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이번 앨범이 다시 한 번 불태우게 만들었다. 인생에 한 번도 없을 것 같던 영통 팬싸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 연인 사이 감정의 순간을 담았다는 moments in between 앨범을 들으며, 내 모든 감정의 순간에 이 아저씨들과 아저씨들의 음악이 있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학생 때부터 그들의 음악이 위안이고 위로였고 대학생일 때도 그랬고, 취준생일 때도 그랬고, 몇 번의 이직을 거듭한 지금도 그렇다. 아마 앞으로도 나의 순간들에 그들의 앨범이 있겠지. 이렇게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가져갈 수 있는 사랑이 있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언제나 그랬듯 심장은 다른 누군가에게 불타며 뛰게 되겠지만, 불타는 사랑은 아니더라도 나를 지탱하는 힘은 있다는 걸 이번 덕질로 깨달았다. 어떤 것에 집착하지 않아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 뜨뜨미지근하더라도 분명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있으니. 우리 아저씨들, 내가 주접이나 떠느라 제대로 말한 적은 없지만 내 인생의 순간들에 항상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분명 불타던 사랑이 끝나던 100일처럼 이 넘치는 스트레스의 업무도 지나갈거다. 그래야만 하고. 나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해피한 오타쿠로 거듭날거다. 아저씨들을 향한 미적지근한 사랑을 다시 베이스로 삼고, 새로운 작품도 볼 것이고, 새로운 음악도 들을거다. 그런 것들로 나는 삶을 채울 것이고 내 삶의 균형을 맞추겠지.
일도 그렇다. 불태우진 않더라도 미적지근하더라도 끝을 내야하고, 성취감은 없을 지언정 끝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또 무언가를 배우겠지.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 나의 커리어를 만들 것이다. 아 일기를 쓰니까 뭔가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다. 그래 생각해서 뭐하냐. 그 시간에 일이라도 하나 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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